비운과 행운 사이의 스타 안정환

부모님은 없었어요. 외할머니와 단둘이 판자촌에서 살았죠. 늘 춥고 배고팠습니다. 산에서 돼지감자를 캐먹었고 수확이 끝난 밭에서 배추 밑동을 뽑아 먹기도 했으며 굿판이 끝난 뒤 죽은 이들을 위해 남겨둔 음식을 밤에 몰래 찾아가 훔쳐먹기까지 했죠.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어린시절

그래서 슈퍼마켓 주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훗날 꽤 성공했을 때도 그 꿈은 그대로였어요. 옷이 없어 매일 같은 옷만 입어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아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너무 슬프고 아파서 가슴으로 울었죠.

 

11살이 되었을 때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축구부가 되면 빵과 우유를 줬기 때문이었죠. 축구부 생활은 너무 힘들었어요 운동도 운동이었지만 사실 가난 때문이었죠. 축구화가 없어 운동화를 신고하다 시장에서 천원짜리 비닐 축구화를 200원 깎아 800원 주고 겨우 샀습니다.

 

조금만 운동을 하고 나면 축구화가 터져버려 셀 수도 없을만큼 꿰매가며 신었죠. 학교와 먼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는 차비도 아낄 겸 학교 창고에 숨어 잠을 자며 전날 받았던 빵을 아껴 먹었고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등, 한창 부모에게 어리광을 피울 11살의 아이는 이렇게 삶을 버텨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더 힘들었어요 합숙을 하면서도 틈만 나면 공사판에 가서 일을 했죠 여기에 축구부 선배들의 상습적인 구타까지 있었죠.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축구부에게 간식으로 지급되던 빵과 우유가 하나 없어지자 선배들한테 밤새도록 두들겨 맞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선배가 뒤늦게 나타나 한마디를 했죠, "그거 내가 먹었는데". 

 

운동에 공사판 일에 안 그래도 몸이 부서질 것 같은데 하루가 멀다하고 폭력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거기에 배는 늘 고팠죠.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어요 자신보다 실력이 없는데 돈 있는 집에 자식이라는 이유로 시합에 뛰는 경우가 허다했죠.

 

다들 아시다시피 8, 90년대 대한민국에서 부모 뒷바라지 없이 운동을 한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되는 거였거든요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는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덕분에 축구 실력만큼은 최고였죠. 그런데 돈 없고 빽 없고 실력은 좋다 보니 여러모로 손해보는 일이 많았습니다.

 

물론 자신의 의지도 있었지만 중학교 졸업 후에는 더 좋은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음에도 14명의 동기들을 받아주는 조건으로 실업계로 진학하였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연세대, 고려대 등 유명 대학교에서 스카우트 전쟁이 펼쳐졌지만 또다시 동기들을 받아주는 조건으로 아주대에 입학하게 되죠.

 

아무리 그의 의지가 있었다 할지라도 만약 그에게 부모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래서 그가 연세대나 고려대를 나왔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뒤에서 더 언급할 내용이긴 하지만 꼬이기만 했던 그의 축구 인생이 조금은 덜 꼬이지 않았을까요?

 

대학 무대 이후 커리어

이후 그는 대학 무대를 평정해 나갔습니다 한 가지 전설의 레전드 에피소드를 소개해드리자면 1997년 국제대회에 출전하고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그는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 바로 대학 축구연맹 결승전이 열리는 장소로 이동했고 후반전 교체 투입돼 두 골 1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기도 했죠.

 

1998년 부산대우 로얄에 입단하며 프로무대에 데뷔한 그는 33경기에서 13골을 기록하며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다음 해에는 35경기에서 21골을 기록하며 사상 최초로 우승팀이 아닌데도 mvp에 오르게 되죠. 또한 실력뿐만 아니라 잘생긴 외모로 k리그의 흥행을 이끌었는데요.

 

당시 그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났습니다. 오빠 화이팅의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그는 앙드레김 패션쇼 무대에도 오를 수 있었는데 함께 무대에 올랐던 지금의 아내를 이때 처음 만날 수 있었고 꽃을든 남자 화장품 cf도 찍었습니다. 이는 전설로 기억되는 2002년 꽃을든 남자 컬러로션과 2006년 꽃을든 남자 코엔자임 Q10 포맨으로 이어질 수가 있었죠. 

 

다시 1999년으로 돌아가서 그해 MVP 혹은 득점왕을 차지하면 유럽 진출을 추진하기로 계약을 맺고 있었죠. 그런데 대우가 파산한 뒤 새로 구단을 인수한 현대산업개발은이 조항에 대해 무효를 주장했고 결국 반년이 지나서야 그는 임대 형식으로 이탈리아 세리에 A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이 임대신분이라는 점이 그의 발목을 잡고 말았죠 임대 계약 사항 중 출전에 따른 추가 임대료 지급 폭은 완전 이적 관련한 복잡한 계약에 얽혀있어 그는 제대로 된 기회를 받지 못한 것이었는데요 표면적으로 보이는 수치는 굉장히 저조했지만 사실 그의 활약이 대단했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빅리그 주전 선수들은 보통 한 시즌 2000에서 3000분 정도 출장을 하고 MOM 6회 이상 선정되는 선수들이 보통 리그 최고의 선수로 인정을 받으며 MOM 3회에서 4회 선정되는 선수들이 각 팀의 에이스급으로 인정을 받는데요 그런데 그는 첫 번째 시즌에 860분을 뛰며 MOM 3회, 두 번째 시즌에는 500분 정도를 뛰며 MOM 2회에 뽑혔죠.

 

뿐만 아니라 평점에서도 150명의 용병 중 9위에 해당하는 평균점을 기록했으며 시간대비 득점률은 400명의 선수 중 12 D위 안에 드는 등 말 그대로 나오면 잘하는데 안 내보낸다라는 이야기가 리그 전반에 돌기도 했습니다. 또한 당시 그의 소속팀 감독이었던 코스미는, "이런 재능을 지니는 선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기회를 많이 줄 수 없어 안타깝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실력 외적인 이유로 그는 많은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죠.

 

그렇게 그는 2년의 시간을 이탈리아에서 보내고 2002년 월드컵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다 아는 대로 기적을 만들어냈죠. 이쯤 되니 누가 봐도 앞으로 그의 인생은 꽃길만 펼쳐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그의 인생 최악의 시련을 맞이하게 되죠.

 

 

예상치 못한 시련

사실 시련은 이전부터 겪고 있었는데요 1998년 그가 프로에 데뷔하고 유명해지자 그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어머니가 나타났고 그는 어머니가 진 빚을 갚아주기 시작했습니다. 연봉을 전부 쏟아부어야만 했고 집을 팔기까지 해야 했죠. 이후에도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어머니의 빚을 갚느라 시달렸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그는 이탈리아전에서 골을 넣었다는 이유로 엄청난 일을 당하고 마는데요. 그의 소속팀 구단주는 이탈리아 축구를 망쳤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방송에서 해냈으며 이탈리아 훌리건들은 그의 차를 박살냈고 집을 부수는 등 살해 협박까지 했죠.

 

때문에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것에 공포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그의 에이전트 또한 이탈리아 복귀를 반대하며 단독으로 이적 협상을 진행했고 결국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사실 월드컵 3 4위전이 끝나고 피파의 장 블래터는 그에게 악수를 청하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진출을 축하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요.

 

그만큼 수많은 명문구단에서 그의 영입을 준비 중이었던 것이었죠. 참고로 히딩크 감독 또한 제일 먼저 그를 아인트호벤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박지성 이영표와는 달리 이미 유럽 빅리그에서 뛰고 있던 데다 월드컵에서의 활약까지 더해져 그의 몸값이 10배 이상 뛰어버려 도저히 영입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몸 값이 이렇게 높아지자 임대를 한 페루자는 이적을 보내기 원했고 원 소속팀 부산과 그의 에이전트는 늦었다며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에 페루자와 에이전트는 각각 이적 협상을 진행했고 결국 영국에서 같은 날 그의 이적 확정 뉴스가 두 개가 발표되었죠 하나는 페루자가 진행한 볼트 행 또 하나는 에이전트가 진행한 블랙번 행이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페루자는 피파에 국제소송을 제기 합니다. 이에 그를 영입하려고 했던 구단들은 법적으로 복잡한 상황에 빠지고 싶지 않았기에 모든 구단들이 그의 영입을 백지화시켰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적료를 지급할 팀이 없어졌고 결국 그가 36억 원의 빚을 모두 떠안게 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죠.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그를 돕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결과론이지만 2002년 월드컵으로 그는 대한민국을 감동과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지만 정작 자신에게 남은 건 국제 미아 신세에 36억원의 빚 뿐이었죠.

 

이때 그는 일본의 한 연예기획사와 빚을 전부 갚아주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게 되는데요 때문에 축구 시즌에는 j리그 축구팀으로 임대를가 경기를 뛰었고 비시즌에는 각종 광고와 예능 프로그램에 쉴새없이 출연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수익은 모두 기획사에서 가져가는 것이었죠. 그는 축구 선수로서 최전성기를 누려야 할 20대 후반의 3년을 이렇게 묶여 있어야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100 경기에서 47골을 터트리는대 활약을 펼쳤고 2004년에는 소속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등 그야말로 최고의 활약을 펼쳤기에 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만약 그런 분쟁이 없었다면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프리미어리거가 됐을 것이고 어쩌면 박지성 손흥민보다 먼저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에서의 계약이 종료된 후 늦었지만 그는 유럽으로 다시 진출했고 2006년 월드컵에서 또 다시 골을 넣는 등 꾸준한 활약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리고 k리그로 복귀해 2년을 뛴 후 중국 리그에서 3년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 했는데요. 빵과 우유를 준다는 말에 처음 축구를 시작해 학교 창고에서 몰래 잠을 청하며 천 원짜리 비닐 축구화를 꿰매가며 공을 차던 이 아이는, 훗날 어머니의 빚을 대신 갚으며 속앓이를 하면서도, 클럽 간의 국제소송에 휘말리며 36억의 빚을 떠안았을 때도, 늘 땀을 흘리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돈과 빽 학연과 지연 하나 없이 오로지 실력 하나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바로 이 선수 판타지 스타 안정환의 이야기였습니다.